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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 2 – 그 어떤 경험도 버릴 것은 없다.
    유월바람 2020. 10. 2. 05:18

    처음 영국으로 유학을 목표로 할 때는 영국에서 4년 정도 살 것을 계획했었다. 1년은 영어를 배우면서 포트폴리오 portfolio준비를 하고, 또 1년을 대학원에서 학업을 하고, 그 후 2년은 영국에서 실무 경력을 쌓고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대학원 학업 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연애를 했고, 학업이 끝나고 몇 달 후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에 대한 계획은 따로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려는 날 새벽에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가게 되었고, 병원에서 일주일 동안 폐렴이라는 병명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남편은 학업에 집중하고, 나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주로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렇게 반년을 쉬고 나서 영국에서의 취업을 준비해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이곳저곳 디자인 design회사들에 냈지만 쉽지 않았다. 쉽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나의 실력과 부족한 영어 능력이 주원인이었겠지만 졸업하고 공백이 좀 길었던 것과 그 당시 경제적인 상황들도 한몫해주었다. 몇 군데는 1차 혹은 2차까지 면접이 진행되었지만, 결과는 늘 실패였다. 나의 실력에 대한 실망과 낮아지는 자존감으로 감정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냈고, 내 인생인데도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인터뷰는 늘 떨린다 © Christina Morillo Pexels 

    그러나 마냥 놀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작은 프린팅 printing회사에서 ‘일주일에 2-3번 출근하는 인쇄물 디자인을 할 직원을 구한다’ 하여 이력서를 냈다. 시각 디자인은 전공 분야가 아니기에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픽 프로그램 graphic programme만 다룰 줄 알면 된다고 해서 우선 그곳에서 일하면서 계속 취업을 준비해보기로 하고 마음먹고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들어간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문을 닫게 되면서 나는 다시 일을 구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미술, 디자인과 관련 없는 일은 아예 나의 리스트 list에 없었지만 결혼하고 제대로 된 일 없이 1년 반이 지나니 이제는 어떤 일이든 시작하고 어느 분야든 경력을 쌓아야 할 거 같다는 마음이 생겼고, 본격적으로 분야를 넓혀 일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들어가게 된 회사가 삼성전자 영국 법인이었다. 나의 전공과 관심사와는 전혀 다른 일이었지만 자리가 났다는 소식에 우선 지원을 했고, 인터뷰 interview도 보았다. 정말 뜻하지 않았고 큰 기대는 없었지만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고는 일단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컸다. 그렇게 2년 반 정도의 기간을 삼성전자의 한 부서에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충실히 했다. 물론 회사를 다니면서 2번 정도 침대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었던 적도 있었다. 그 이유는 디자인 분야와는 다르게 반복적이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의 상황이 못마땅해서였다. 그리고 동료 중에 임신을 하고 출산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는 문제로 부서 내에서, 그리고 본인 자신도 고민하고 눈치 보고 불편해하는 상황들을 보면서 어차피 아이를 가지면 그만둬야 하는 상황들을 보니 나도 이대로 있기보다 아이가 생겨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거나 준비해야 한다는 고민 끝에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삼성전자에서 일한 경력 덕분에 작은 무역회사에서 오전 근무만 하는 파트타임 part time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었고, 오후에는 아이들 미술 개인 레슨 lesson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들 미술 레슨은 주변에 지인들이 부탁 & 소개를 해주면서 우연치 않게 시작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미술과 디자인의 아주 작은 연결고리라도 이어진 기분에 마음의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러나 또 일 년이 채 되지 않아서 무역회사가 조금 어려워지면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내가 정리 해고 대상자 1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구직활동이 시작되었고, 한국 유명 유학원의 런던 지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꼬박 1년을 힘들게 일을 하고는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사직서를 냈다.

     

    그렇게 작게나마 나의 일을 시작했고 7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참 많은 프로그램, 프로젝트를 했다. 주 업무는 회사들의 브랜드 brand와 마케팅 marketing에 필요한 시각 디자인 작업과 영국에서 미술 전공을 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런던의 박물관, 미술관과 연계한 어린이 &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의 커리큘럼 curriculum을 직접 구성 및 진행, 다양한 전시 기획, 공간 디자인의 소싱 saucing업무와 공간 디자인에 대한 컨설팅 consulting등 여러 경계를 넘나들며 일을 하고 있다. 이렇게 나의 일을 시작해서 하다 보니 많은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그래도 그동안 다양한 회사에서 경험했던 것들이 버릴 것 없이 작고 크게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유학생 시절 레스토랑 restaurant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들까지도 관련 업종의 고객을 만났을 때 그 분야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도 도움이 되었었다.

     

    영국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세상과 타인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멋지고 성공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이 사회에서는 모두 필요하고 귀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앞에 놓인 길의 여정에 힘이 되어줄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프로젝트들이 앞으로의 길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앞에 놓인 길의 여정 © Tom Swinnen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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